2016년 읽은 책들 결산 by WaltzMinute



2016년 상반기 17권, 하반기 23권 / 매월 3.33권 읽음
올해의 책 : "텍스트의 포도밭" (이반 일리치)


 2016년이 지난지 벌써 일주일이다. 2016년에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포닥으로 9개월 일했다. 전문연구요원 기간이 아직 남아서 출신 연구실에서 포닥으로 남아, 내 생활에 바뀐 것은 많지 않았다. 다만 학생 때에 느끼는 압박감이 이제는 피부에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다. 또, 이제 올해로 고대에서 10년(학부 4년, 대학원 5년, 포닥 1년)을 맞이 하게 되는데, 고대에서의 삶이 이제는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나이 서른. 나와는 관련 없을 것만 같던 숫자의 무게가 느껴진다.

 서른이라는 숫자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나는 물리학자로서, 연구 주제에 대한 고민, 학자로서의 삶, 연구만 잘 하는 과학 기계가 아닌 윤리적인 학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와 멀리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라는 숫자만 쌓아올린 사람이 아닌, 지나간 시간들 만큼 깊어진 사람이 되기 위해선 끊임 없이 배워야 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올해의 책은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이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현대의 읽기라는 행위와 중세 시대 수도사들의 읽기가 무척이나 달랐음을 보인다. 스마트폰의 시대에서 읽기는 현대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행위이지만, 이반 일리치는 읽기라는 행위의 여명으로 돌아가 읽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p.86
후고는 읽을 때 수확을 한다. 행들로부터 열매를 딴다. 그는 파지나(pagina), 즉 페이지라는 말이 함께 나란히 놓인 포도밭 이랑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 플리니우스가 이미 주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페이지의 행은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었다. 그가 양피지 책장에서 열매를 딸 때 그의 입에서는 보체스 파지나룸(voces paginrum, 페이지의 목소리)이 떨어진다.
pp.118-119
그러나 또 한 종류의 사람들, 자연이 능력을 한껏 채워주고, 진리에 이르는 쉬운 길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능력의 불평등도 있지만, 이들이 모두 훈련과 학습으로 타고난 감각을 계발하는 일에 똑같은 덕성이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 자질이 좋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두 종류에 주목한다. 무책임한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다.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 필요 이상으로 이 세상의 일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의 악덕과 관능적 탐닉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이 준 달란트를 땅에 묻고 거기서 지혜의 열매도 선한 노력에서 나오는 이윤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들을 발데 데테스타빌리스 (valde detestabiles), 즉 "전적으로 혐오스럽다"라고 생각한다.
p.120
후고에 따르면 스투디움 레젠디는 모두에게 제시된 소명이며, 이것은 곧 배울 의무가 된다. 둔하건 총명하건, 능력이 많건 적건, 의지가 강하건 약하건 '모두'가 배움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후고 이전의 그 누구도 학습의 보편적 의무라는 신조를 이런 표현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2016년이 유독 그렇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분명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턱밑까지 차고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모두가 이익을 좇을 뿐 배우지 않는 세상, 이성과 대화 대신 분노와 공격에 몸을 맡기는 세상, 아무도 페이지를 넘기며 포도를 수확하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배울 의무"를 얘기하는 후고와 이반 일리치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진다.

 "배우지 않는 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먹고 살기 힘들어 배울 수 없다, 배움은 어렵다, 재미가 없다, 등등의 핑계는 결국 내 삶을 분노와 충동,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기술자들과 자본가들에게 바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뿐더러, 내 삶 뿐만이 아닌 이 세상을 망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레 미제라블, 김정환 번역 셰익스피어 전집 3차분, 혼자가 되는 책들, 음악의 기쁨 또한 즐겁게 읽었던, 기억에 남는 2016년의 책들이었다. 특히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윤리적인 삶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켜주었다. 내년엔 피터 싱어의 저작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효율적 이타주의자)도 읽어볼 생각이다. 윤리적인 삶에 대한 고민은 내 커리어나 물질적 부를 키워주지는 못 할 지언정, 적어도 부끄러운 삶을 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끄러운 삶을 살아놓고도 부끄러운지 모르는 자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요즘, 윤리적 삶에 대한 고민이 주는 무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2016년 상반기에 읽은 책 리스트
미학특강 (이주영)
폴라리스 랩소디 1, 2, 3, 4 (이영도)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1, 2, 3 (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모린 코리건)
갈망에 대하여 (수잔 스튜어트)
좁은 문, 전원교향곡, 배덕자 (앙드레 지드)
레 미제라블 1, 2, 3, 4, 5 (빅토르 위고)

2016년 하반기에 읽은 책 리스트
희랍어 교실 (한강)
심벨린 (셰익스피어)
존 왕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셰익스피어)
헨리 4세 1, 2부 (셰익스피어)
헨리 5세 (셰익스피어)
헨리 6세 1, 2, 3부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
헨리 8세 (셰익스피어)
호안 미로 특별전 도록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혼자가 되는 책들 (최원호)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혼자 가는 미술관 (박현정)
인간의 길을 걷다 (장 지글러)
오페라의 두번째 죽음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단테 알레기에리)
텍스트의 포도밭 (이반 일리치)
모양 (필립 볼)
음악의 기쁨 상권 (롤랑 마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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