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여, 바다여, 삶과 노력 by WaltzMinute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p. 389
틀림없이 이 이야기는 모든 열정이 소모된 뒤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물개와 별, 설명, 포기, 화해 등 모든 것이 어떤 담담하고, 불분명하지만, 더 높고 빛나는 의미 속에 집중되었을 때 끝나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예술과 달라서 반전이 일어나고, 해답에 의심을 품으며, 부딪치고 절뚝거리면서도 초조하게 계속되는 면이 있어서 대체적으로 행복하게 혹은 고결하게 생을 누리기는 불가능하다.

1.
 이 소설이 읽기 편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읽기 편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플롯이나 작중인물에 몰입하기 쉽다. 그러나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는 (적어도 내겐) 몰입하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독자는 사건의 진행에서 한 발 물러나, 담담하게 주인공의 광기와 도덕적 성장의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이런 점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회고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이리스 머독이 의도적으로 소격효과를 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작가는 독자에게 소설을 통해서 삶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노련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독자는 절대 몰입하기 어려운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을 관찰하면서, 역으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2.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역사 이전", 6장으로 이루어진 본편에 해당하는 "역사",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역사, 그 후의 이야기 - 인생은 계속된다"이다. 작품을 읽을 때 한가지 물음이 든다. 작품에서 말하는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의 역사일까.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1) 주인공 찰스가 첫사랑 하틀리와 노년에 재회하는 사건이 그의 삶에서 하나의 "역사"라면 그 사건 이전 찰스의 삶은 역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일까? 마치 지구가 태양을 따라 공전하듯, 찰스의 삶은 하틀리와 재회한 이 사건을 따라 공전하는 삶이었다는 뜻일까?
2)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말과 같다면, 이 작품은 찰스의 부정확한 기억으로 인해 빚어진 확신이 그의 삶 전체를 망가뜨린, 일종의 촌극을 그린 것일까?

3.
 삶은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바뀔 수 없다. 우리가 때로 마주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한순간에 바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다. 삶을 바꾸는 것은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달콤한 환상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구현하는 부단한 노력이다. 선을 깨닫는 것은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의 삶에선 무엇이 선인지 명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다여, 바다여"에서 주인공 찰스가 그러하듯) 내가 한때 선이라고 분명하게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는 결코 선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기도 하고,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암시하는 상황처럼) 악에 유혹 당하기도 하며, (우리가 매일 그러듯) 선을 행하는 노력이 자주 실패하거나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아이리스 머독은 말년에 치매로 자신이 평생 일궈놓은 지적 자산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영화 "스틸 앨리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 기자는 영화와 아이리스 머독 사이의 연관성을 추측하기도 한다.) 빛나는 지성을 자랑하던 철학자 겸 소설가가 말년엔 텔레토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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