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 비키는 환상을 외면하지만 결국 환상에 굴복하고야 마는 인물로, 크리스티나는 환상에 눈이 먼 나머지 현실을 외면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비키는 후안 안토니오와 마리아 엘레나의 다툼 사이에서 손에 총을 맞는데, 그 총성에 비키는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간다. 그 총성이 마치 환상에 빠져들려는 찰나 현실이 울리는 알람 소리라도 되는듯이. 비키는 미국으로 돌아가 바르셀로나의 일을 과거로 묻어두었지만 그 이후로 남편과 어떻게 지냈는지 영화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크리스티나는 그녀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기를 계속했다고 말해줄 뿐이다.("Christina continued searching certain only of what she didn't want")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환상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설가 길이 한밤 중의 파리에서 만난 인물들은 작가로서 그의 환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피카소,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드가, 고갱, 달리 등 작가라면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아니,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중에서도 길이 가진 환상을 대변하는 인물은 단연 아드리아나일텐데, 심지어 길과 그녀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길은 자신이 현실로 돌아와야 함을 알고 그녀와 헤어져 현실로 돌아간다.
<로마 위드 러브>에서는 조금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나온다. 네 가지 에피소드의 인물들은 "뚝 떨어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들이 로마 토박이이건 외국인이건 간에, 우연성이 지배하는 관광지로서의 로마는 그들에게 갑작스러운 우연성을 부여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언론의 관심이나, 방을 잘못 찾아온 창녀, 유명한 배우와의 우연한 만남, 우연히 방문한 여자친구의 친구, 우연이 인연이 된 며느리의 장인(우디 앨런) 등 영화는 인물 외부에서 찾아온 우연에 의해 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영향 받고 흔들리는지 끈질기게 연구한다. 그러나 결국 인물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우연에 의해 현실에 내려온 환상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디 앨런이 바르셀로나, 파리, 로마를 거치는 유럽 삼부작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 환상과 현실이 가지는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환상에 도취된 인물들이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환상의 허무함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그나마 해답에 가장 가까운 것은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이 환상 속의 황금 시대에서 현실로 돌아와 약혼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것이겠지만, 새로운 사랑이 또다른 환상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환상을 지고 살고 있다. 환상의 종류도, 크기도,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계획도 야심도 천차만별이다. 나또한 환상 때문에 괴로웠으며, 동시에 성취했다. 환상은 때로 미래를 위한 추동력일 수 있지만, 동시에 때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목을 잡는 족쇄일 수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우디 앨런은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마 우리로 하여금 그 두 가지 환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현실 위에 서 있게 해주는 해답은 각자 찾아나가야 할 몫일 것이다.
*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우디 앨런 유럽 삼부작"이나 "Woody Allen's Europe trilogy" 같은 키워드로 구글링 해보면 많지는 않아도 간간히 페이지가 뜨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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