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루 궈,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p.328.
당신: "미래를 '지금' 가질 순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미래거든."나: "난 동의 안 해. 미래는 당신의 계획, 당신의 진짜 행동에서 나와."당신: "아냐, 그건 사실이 아냐. 미래는 그것이 찾아올 때에만 오는 거야. 나는 약속을 믿지 않아. 어떻게 지금 미래를 알 수 있겠어? 미래는 미래에 도달했을 때에만 알 수 있어."
강영안,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p.110.
수많은 계획들이 있었다. 사소한 계획들도 있었고, 하루하루 두근거리는 큰 계획도 있었고, 소소한 일상 속의 계획이 있었으며, 달력에 적어놓고 기다리는 계획이 있었다. 그중 어떤 것은 현실이 되고 그중 어떤 것은 그저 계획으로 남았다. 계획을 세울 "당시"와 그 계획들의 결과가 나온 "지금"을 비교해보면, "당시"의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지금"의 모습과 같지 않을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일들과 우연들이 그 계획을 망쳐놓고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을 세울 "당시"의 나는 분명 그 계획들을 곧 다가올 미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나는 미래를 알지 못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WLOG(Without Loss of Generality), 현재의 나 또한 미래를 알지 못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다. 우리를 덮쳐오고 예기치 못한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미래이다. 손에 거머쥘 수 없고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래는 나에게 타자(l'autre)이다. 미래와의 관계는 곧 타자와의 관계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미래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정으로 미래를 아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계획을 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불확실의 영역에 속한다. 게다가 수치로 계량되지도 않는 불분명한 확률로 정의되는 미래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를 아는 대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의외성이 있다. 그것은 삶이 타자와의 관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철학을 빌리자면, 타자는 무한자이다. 나와 아무리 많은 것을 공유한 타인이라도, 그 타인은 나에게 늘 미지의 영역을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계속 무언가를 던지는 것에 대한 갑작스런 대응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누가 무엇을 던질지 우리는 그것을 받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에게 날아온 그것을 받고서야, 우리는 그것이 공인지 쓰레기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때문에 E.M. 포스터가 말한 것처럼 삶을 계획한다는 것은 "갑자기 아무 의미 없어지거나 아니면 너무 많은 의미를 담게" 되는 것이다. 계획이 물거품이 되거나, 지나치게 오버페이스한 과장된 계획이 되거나.
기표가 기의 위에서 계속 미끄러지듯, 계획은 미래 위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공들여 계획을 세우고, 어떤 것은 이루어지고 어떤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삐그덕거리며 삶이 움직인다. 약간은 투박하지만, 내 삶의 전체적인 방향성이라도 계획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삶의 세세한 현장들 속에서, 나는 늘 계획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다가온 미래에 실망한다. 언제쯤 삶을 멋지게 초견 연주하듯 살아갈 수 있을까.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조금 나아진 것도 같지만, 여전히 나는 내 자신이 불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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