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미술관 소통의 기술 전, 소통에 묻다 by WaltzMinute



"예술이 끊임없이 소통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불가능의 미션이 갖고 있는 끝없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2011년 10월 18일부터 12월 4일까지 진행되는 "소통의 기술" 전은 서로 다른 국적과 배경을 가진 4명의 작가의 전시이다. 알바니아 출신이며 베를린과 파리에서 활동을 하는 안리 살라(Anri Sala), 한국 출신이며 서울, 암스테르담, 이스탄불에서 활동을 하는 함양아, 알제리 출신의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쿠바 출신의 호르헤 파드로(Jorge Pardo)의 작품 11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는 자체가 작가들이 소통과 소통의 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동시에 그들의 질문이 얼마나 관객과 소통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즉, 질문에 질문이 중첩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시가 이처럼 질문의 복층 구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소통"이라는 주제 자체가 가지는 복잡성, 또는 자체의 미해결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굳이 소쉬르를 거론하며 파롤과 랑그의 갭(전시 팜플렛의 이수연 학예연구사 글 참조)을 말하지 않더라도, 일상의 영역에서 소통의 문제는 늘 가장 닿기 어려운 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항상 소통하지 못 하거나, 또는 그 소통이 불완전 했기 때문에 싸우고 상처주고 헤어지고 미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계속해서 실패하는 소통에 다시 메달리고 희망을 가진다.

 이처럼 소통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말하고 소통을 지향한다.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은 소통의 실패가 계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실패를 건너 다음 실패로 나아가고 다시 그 다음 실패로 나아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일지도 모른다.(소통의 이러한 아이러니한 성질은  정부의 소통 캐치프라이즈가 공허한 실패로 끝난 에피소드에서 블랙 코미디적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수연 학예연구사의 말처럼 그것은 소통이 불가능한 미션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소통하지 못 하더라도, 불가능한 소통에 닿으려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서 수많은 가능성의 가지들이 뻗어나오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 글은 전시가 가진 두 가지 중첩된 질문에 대한 나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애초에 무엇을 말하고자 했건,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은 감상자에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작품을 통해 작가가 A라고 말했지만, 다시 작품을 통해 내가 Z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불완전한 소통을 지칭하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1. 안리 살라
 미술관의 첫 번째 방에 들어가면 안리 살라의 강렬한 비디오 작업 <After Three Minutes>가 시선을 잡아 끈다. 온통 어두운 방 안에서 역시 어두운 화면 안에 심벌즈가 끊임 없이 진동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그 옆에선 심벌즈가 진동하는 장면과 어두운 그것을 보고 있는 놀란 표정의 인형을 담은 장면이 파편화되어 제시된다.-마치 관람자가 그 인형이라도 한 것처럼.-

 기둥을 돌아 뒷편으로 가면 <Long Sorrow>라는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흑인 색소폰 연주자가 건물 외벽 난간에 앉아 색소폰을 불고 있는 장면이 제시되는데, 연주자의 발 밑으로는 베를린 시내가 매우 위태롭게 펼쳐져 있다. 연주자는 즉흥 연주를 하며 일종의 몰입 상태에 빠져 있는데, 매우 가까이 클로즈업되는 그의 얼굴 근육과 흰 눈동자(연주자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연주하는 동안 대부분 눈꺼풀 너머로 숨어 있다.)에서 그의 고뇌, 그리고 우리의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비언어적 표현인 즉흥 연주-그때 그때의 감정과 의식의 흐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음악 연주보다 더욱 비언어적일지도 모르는-와 연주자의 표정이 그의 말보다도 "긴 슬픔"을 더욱 잘 전달할 수도 있다. 어차피 기표가 기의 위를 무한히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언어 바깥으로 나서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소통에 대한 하나의 단초,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Give me the colors"라는 뜻을 가진 마지막 작품은 <Dammi i colori>는 황폐한 분위기를 가진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의 풍경이 색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주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티라나의 건물들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간간히 작가 안리 살라의 나레이션이 삽입된다.

 안리 살라의 나레이션 중, 색채는 거주자의 취향을 반영하는데, 도시에서는 모든 거주자의 취향의 평균인 회색이 남을 뿐이라는 말이 있었다. 단순한 평균인 회색은 소통의 실패를 의미한다. 거시적인 입장에서 거칠게 사람들의 삶의 평균을 취한다면 우리는 회색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미시적인 눈으로 잘 살펴본다면, 그 회색 안에는 수많은 빨강과 파랑과 녹색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진다면, 소통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2. 함양아
 <One Day Escaping>은 두 개의 스크린으로 나뉘어 있는 작품인데, 오른쪽 스크린에서는 바닷가를 향해서 사람들과 차들이 왼쪽 스크린으로 다가오고, 왼쪽 스크린으로 넘어오자마자 그 사람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하나의 단절을 넘자마자 사라지는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가로 향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고전적으로 자살을 의미한다. 게다가, 왼쪽 스크린으로 사라지기 위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쪽 스크린의 한 편에서 계속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남자는 마치 저승 문을 지키는 사자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자살은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한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탈출, 또는 지독한 소통이라는 문제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 came for 행복/항복>는 작품 자체가 제목을 지칭한다. 이 작품은 "I came for 행복"이라는 네온사인 글자가 있고, 행복의 "행" 자의 세로 획 부분의 네온사인이 깜빡이며 행복<->항복을 반복하는, 일종의 시각적 중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은 마치 항복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듯이 점멸하는 푸른색 메세지를 전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항복한다는 것일까. 전시의 주제가 소통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항복한다는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통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함구하고 무시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체로 "불가능하다."이기 때문이다.-물론 몇 가지 단서가 붙겠지만- 매트릭스의 "파란 약"을 먹고 냉혹한 답에 외면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필립 파레노
 <Speech Bubbles> 가득 차다 못해 전시장 밖으로까지 흘러 넘치는 금빛 말풍선. 소통에 대한 열망은 늘 가득하고, 때로는 그것이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올 때도 있지만, 의미들은 풍선 내부에 갇혀서 자유로운 공간으로 나오지 못 한다. 게다가 그것은 결국 톡 하면 터질 만큼 약하고 불안정한 것이어서 영속적인 것일 수가 없다. 즉, 넘쳐나지만 연약한 금색 풍선은 소통이라는 문제에서는 소통을 향한 열망만 있을 뿐,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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