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공감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공감과 이해는 모두 상대방을 아는 방법이다. 공감과 이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위에 써놓은 두 문장을 읽어보면, 얼핏 느끼기에는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애써 차이를 끌어내자면, 공감은 감성적인 것이고 이해는 이성적인 것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분석을 걷어내고 나면 공감과 이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공감과 이해는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레몬과 라임, 오렌지와 자몽과 같은 것이다. 겉 모습은 비슷해보여도 맛을 보면 전혀 다른.
공감은 나의 기억과 상대방의 상황이 맞물릴 때 일어난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내 삶에 각인해 왔고, 나에게 각인된 기억들과 상대방의 상황이 비슷할 때 나는 상대방에게 공감한다. 내가 의식하지 않고 있더라도,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말하는 상대방이 있으면 공감은 자동적으로 발생된다. 나와 상대방이 공감할 만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비슷한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만 하면 상대방에게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감은 작은 확률로 쓰여지는 우연 위에 놓여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확률 위에 서 있기만 한다면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감은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반면, 이해는 능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공감할 만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꽤나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해는 장비 없이 빈 손으로 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상대가 처해 있는 상황에 나를 대입함으로써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노력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을 한다고 해서 늘 그 노력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노력은 실패에 그치고 나는 여전히 상대방을 알지 못 한 채로 끝나버린다.
하지만 그 "노력"의 가치는, 그것의 성공 여부에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타인인 두 사람이 서로를 알고자 번거로움을 무릅쓴다는 사실은 -김연수가 말했듯이- 이 시대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노력조차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 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공한 노력과 실패한 노력을 통해 파편으로나마 서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공감과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작은 확률이 맞아 떨어져 우리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공명하는 종소리처럼 두 궤적이 일치하는 그 순간에는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순간이 정말로 흔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는지조차 뚜렷하기 않기 때문에, 그러나 늘 그것을 갈망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 공명의 순간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덧글
좋은 가르침 받고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아쉬움을 달래고 오해를 풀기 위한 대화에 주로 등장하는 공감과 이해라는 어휘, 그에 관한 전제로서 이 글이 가지는 가치가 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