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과 소외를 말한 이들 사이에서 의미를 찾기 by WaltzMinute




오래전부터 수많은 소설 작가들과 시인들과 예술가들과 학자들은 우리 모두가 소외된 사람들이며 방랑자라고 얘기해왔다. 우리는 모두 세계로 기투(project)된 존재이기 때문에 늘 불안을 느낀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은, 수도 없이 제기되어 온 "우리는 소외된 자이며 방랑하는 자이다."라는 낡은 명제에 대한 하나의 방점일 것이다. 만약 그 모든 주장과 철학적 논의와 사색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해 하며 방랑과 소외라는 우리의 속성으로부터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의 상태로 들어가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그 안에서 어떤 것을 찾아내고 발굴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이 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이다. 그리고 성긴 그물로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건져내듯이, 그 목소리들로부터 어떤 무언가를 건져내기를 기대하며 고민의 그물을 사유의 바다로 던질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상), p26.
세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방랑자이자 경계인이다. 그것은 오늘날 어느누구도 한 곳에 속하여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고(신자유주의의 기수 밀턴 프리드먼이 고용 유연성을 주장하며 든 비유인 "모든 사람이 보트를 타고 배를 젓는" 상황은 이것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일 것이다. 우리는 방랑과 고독을 시대정신으로 삼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더 본질적으로는 어느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머무르고 싶어하는 소망을 품고 있지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늘 방랑하는 것이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에는 넓은 공간이 있지만 우리를 받아줄 공간은 어디에도 없으며, 우리가 목소리를 구할 때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작은 소리라도 들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아 평생 헤맬 수 밖에 없다. 어젯밤에도, 그 어젯밤에도 우리는 작은 희망만을 통해 가슴을 위로하며, 계속해서 삶의 이 지방 저 지방을 헤매면서 그 무언가를 찾을 수 밖에 없다.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p86.
나는 언제나처럼 밤 한가운데 있다.
어젯밤처럼 심장을 위로하고 드러누워, 얼굴은 병풍을 향하고 있다. 눈은 반쯤 감고 있다. 장님 법사는 여전히 비파를 둘러메고, 튼튼한 다리로 이 지방 저 지방을 떠돌며 걸어 다니고 있다. 정착할 마음이 없는지, 아니면 아직 정착할 만한 고장을 찾지 못했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때로는 삶 속에서 완전히 지쳐버려서 그 무언가-정착할 수 있는, 이해를 교환할 수 있는-를 찾을 마음이 사라지기도 하며, 그 무언가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몰이해의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우적거림은, 목소리를 찾는 우리의 부질없는 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조금 더 멀리 본다면, 우리의 이러한 숙명은 우리의 정신적인 조상들로부터 상속되어 온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p249.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라는 발자끄의 말을 생각해보면 1830년 이래 유럽의 인생관이 얼마나 수미일관하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인생관에는 항상 지배적이고 점점 더 깊어지는 한가지 불변의 특징이 있다.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그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
라는 발자크의 말은 "소외와 고독"의 상속을 상징하는 하나의 선언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남에게 발견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한다. 심지어 평생을 같이 하는 배우자라도 상대방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앞서 이미 한번 인용한 적 있는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둘이서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눈을 감는 건 결국 혼자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확신이 없는 더듬거림, 그러니까 바로 직전에 눈이 멀어버린 불쌍한 사람처럼 서투른 더듬거림 뿐이다. 열번 더듬어도 한번 닿기 힘든 손짓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본질을 파악하지도 못 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무미건조한 것으로 바꿔버리기 쉽다.

그러나 끝 없이 더듬거리는 존재로서 우리는 그 더듬거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파도 앞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릴 것임이 분명하기도 하거니와,-그렇다면 삶은 유지될 수 없다.- 더듬거림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희망이 없는 이 미로 속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는 자,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발견하리니."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 또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관계들 사이에서, 현명하게 더듬거리고,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목소리를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는 있어도,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움은 목소리에 대한 영원한 갈망과 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 해도, 그것들을 버티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 - 인간 실격, pp61-62.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핟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위안되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쓸쓸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소외되어 방랑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소박한 위로가 될 수 있다. 그 고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고통을 조금 더 버틸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물론 나의 고통이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반대로 그 고통을 더욱 큰 것으로 만들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게다가, 같이 머물기는 힘들겠지만, 끝 없는 방랑의 길 위에서 잠시라도 누군가와 동행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우리가 각자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쓸쓸함의 기류 속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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