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와 마농, 유폐로의 무한 회귀 by WaltzMinute



이번 학기 교양 수업에서 보고서로 썼던 글인데, "마농 레스코"라는 작품을 분석한 글입니다 :D


1) 에셔와 마농 레스코, 끊임없이 반복되는 “유폐(Imprisonment)”의 주제
 


<그림 1. M. C. Escher - "상승과 하강(Ascending and Descending)">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에셔(M. C. Escher)의 "상승과 하강(Ascending and Descending)"이라는 작품이다. 작품 속 건물의 상단을 보면 무한히 반복되는 계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계단은 “펜로즈 계단(Penrose stair)”라고 하는데, 끊임없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결국에는 제자리에 머물게 되는 무한 회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 감상자의 시선은 계단을 걷고 있는 수도승들을 따라 탈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계단에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선은 계단 속에서 무한히 맴돌게 된다. 즉, 감상자는 이 계단 안에 갇힌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감상자가 이 계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이외에는 계단을 탈출할 수가 없다.

 "상승과 하강"의 수도승들처럼 "마농 레스코"의 주인공 슈발리에 데 그리외와 그의 연인 마농 레스코도 에셔의 계단 속에 갇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갇히거나, 상황에 의해 어딘가로 쫓겨 가는 식으로 반복해서 유폐되고 있다. 무한히 회귀하는 에셔의 펜로즈 계단에 갇힌 수도승들처럼 이들 연인도 무한히 반복되는 유폐의 운명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 비운의 커플이 거친 유폐 과정을 쫓아가보자. 처음에 슈발리에는 마농 레스코와 도피를 한 후 그의 형에게 붙잡혀서 한동안 아버지에 의해 집에 갇히게 된다. 이어서 그는 무슈 드 G... M...에 의해 귀족가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생 라자르 수도원에 갇히고, 그 곳에서 대담한 탈출을 벌인다. 곧 그는 마농 레스코를 부녀자 감화원에서 탈출시킨 뒤 파리를 벗어나 근교에서 숨어 지낸다. 그러던 중 그는 무슈 드 G... M...의 아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다 발각되어 샤틀레로 들어가게 되고, 무슈 드 G... M...과 슈발리에의 아버지의 거래에 의해 마농은 아메리카로 이주 당하게 된다. 슈발리에는 마농을 따라서 아메리카로 가지만, 그 곳에서도 쫓겨나 결국 두 연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집, 생 라자르, 파리 근교, 샤틀레, 아메리카, 죽음으로 이어지는 반복되는 유폐 과정에서의 두 연인의 모습은 에셔의 계단 속 수도승들과 닮아 있다. 에셔의 작품에서 감상자가 작품 내부에서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단에는 입구도, 출구도, 상승도, 하강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외부로 벗어나는 것만이 에셔의 계단의 유일한 탈출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두 연인이 유폐의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 밖에 없지만, 그 것은 가능하지 않은 방법이다. 즉, 이러한 유폐는 삶 내부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유폐의 운명은 죽음을 통해 삶의 외부로 나감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슈발리에는 비로소 마농의 죽음을 통해서 자유로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폐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농 레스코"는 스스로의 사랑에 의해 무한히 반복되어 갇혀버리는 연인들의 무한 회귀되는 유폐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에셔의 계단을 걷고 있는 수도승이며, 무한히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이다.


2) 욕망하는 것은 곧 갇히는 것이다.

 반면, "마농 레스코"의 유폐의 주제는 한 차원 더 확장될 수 있다. 다시 에셔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에셔의 작품에 나오는 구조물들은 본질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즉, 허구이다. 감상자의 시선은 허구적인 대상을 쫓아 무한히 회귀하는 계단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에셔의 계단 속에 감상자의 시선이 갇힌 것처럼, 허구와 현실의 사이에서 욕망은 길을 잃게 된다. 욕망은 현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욕망은 현실이 아닌 플라톤적인 이데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허구에 미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 욕망은 정념을 장작 삼아 더 거세게 불타게 된다. 정념에 의해 추동된 욕망은 추구하는 바인 허구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된다. 이처럼 욕망은 끊임없는 갈증 상태에 있으므로, 욕망은 결국 자신을 에셔의 계단 속에 가두게 된다. 즉,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서이든, 그 욕망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기 때문이든)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곧 스스로를 유폐의 운명 속으로 가두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주제는 비단 "마농 레스코"의 두 주인공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뤘다. 예를 들어, 올해 초 개봉한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여주인공 에이프릴은 허구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을 욕망하지만 결국 그 욕망은 스스로를 가두고 그 욕망에서 해방되고자(혹은 그 욕망을 이루고자) 자살로 끝을 맺는다. 또한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도 이상적인 사랑을 욕망하지만, 결국 그 욕망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르게 하였다.

욕망에 대한 몇몇 철학자들의 관점도 같은 맥락에서 동일하다. 프랑스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은 자체 근거를 갖지 못하고, 어떤 것을 욕망하더라도 그 것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할 수 밖에 없더라도 계속 욕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욕망을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존재의 결핍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욕망의 과정은 계속적인 치환에 의한 과정이므로, “욕망은 환유”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러한 “욕망에 의한 유폐”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들 인간은 에셔의 계단 속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수도승과 같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욕망에 의해 갇힌 존재인 것이다.


3) “욕망에 의한 유폐”의 다른 측면, “생산하는 힘”

 지금까지는 슈발리에와 마농이 유폐된 연인이라는 비극적인 관점에서 "마농 레스코"를 보았다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즉, 그들이 사랑(혹은 욕망)에 의해 유폐의 운명 속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러한 유폐가 반드시 비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다. 구조주의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 가진 생산하는 힘’을 탐구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승과 하강"의 계단에 갇혀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는 인물들이 수도승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을 갇혀 지내는 수도승은 스스로 유폐의 운명을 선택한다. 스스로 선택한 유폐의 운명 속에서 수도승들은 무언가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셔의 계단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계단을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미로의 명문"에서처럼 그 속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어야’하는 것이다. 즉, 욕망에 의한 유폐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속에서 “생산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농 레스코"의 두 주인공 또한 스스로 그들의 사랑을 선택했고,(비록 그 것이 그들의 의지가 아닌 정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선택은 그들 자신이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사랑-욕망에 의해 유폐되는 운명 속에서 “생산하는 힘”을 발견하였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생산하지 못하고 썩어버릴 뿐이지만, 세차게 흐르는 물은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시도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슈발리에 데 그리외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몰타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거나 마농이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냈다면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되는 지극한 쾌락을 경험할 수 있었을지는 회의적이다.

 지금까지 "마농 레스코" 속 두 연인의 사랑을 에셔의 "상승과 하강"의 무한 회귀 구조와 비교하여, "마농 레스코"가 다른 층위에서 세 가지 측면, 즉, “유폐의 운명”에 갇힌 두 연인, 욕망에 의한 유폐의 필연성, 유폐로 인해 얻는 “생산하는 힘”의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단일한 플롯이 한 가지 코드(욕망)로도 여러 가지로 변주될 수 있기에 "마농 레스코"가 가진 힘을 느낄 수가 있다.


덧글

  • 야구멘토 2010/02/21 19:21 # 삭제 답글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으나 에셔의 무한계단에 관한 무한회귀반복의 구조를 통한 소설의 분석이 재밌네요. ^^

    인간은 누구나 수도승과 같은 한 삶을 살다 가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를 망각하고 그저 살아가는 존재로 있다가도
    자신의 존재론적 질문을 해보며 다시 펄덕거리는 삶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같습니다.

    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해볼 수 있는 그림과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WaltzMinute 2010/03/01 18:02 #

    부족한 글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현명하게 길을 잃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되지 않네요..
    몇 가지 목표를 세워놓고 직진하는 것보다 현명하게 길을 잃으며 사는 것이 더 인간답게 사는 것 같은데... 목표를 따라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것보다 삶 속에서 현명하게 길을 잃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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